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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사천자문_56.任推戴禑 旦廢?殺(임추대우 단폐요살) 56.우왕·창왕·공양왕 - 몰락하는 고려?

oldboy-1 2014. 3. 11. 14:58

우왕·창왕·공양왕 - 몰락하는 고려

한정주 한국사천자문

任推戴禑 旦廢瑶殺

(임추대우 단폐요살)
이인임은 우왕을 추대했고,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죽였다.

 

任(맡길 임) 推(밀 추) 戴(일 대) 禑(복 우)
旦(아침 단) 廢(폐할 폐) 瑶(아름다운 옥 요) 殺(죽일 살)

 

1).공민왕의 아들인가? 신돈의 아들인가?

신돈(辛旽)의 처형과 동시에 공민왕(恭愍王)은 집권 초기부터 줄곧 견지해 온 개혁적 성향의 통치 스타일을 내던져버리고, 타락과 방탕에 빠져듭니다. 특히 공민왕은 다음 보위를 이을 후사(後嗣)를 얻기 위해, 입에 담기 힘든 엽기적인 성행각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공민왕의 비극적인 최후 역시 이 엽기적인 성행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민왕은 말년(末年)에 김흥경, 홍륜, 한안 등과 어울려 타락과 방탕을 일삼았는데, 왕비(王妃)와 함께 잠자리를 하는 것도 예사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식을 얻게 되면, 공민왕은 누구의 씨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후사로 삼고자 했습니다.

결국 1374년, 왕비인 익비가 임신했다는 말을 내시 최만생으로부터 전해들은 공민왕(恭愍王)은 뒷탈을 없앨 목적으로, 익비와 함께 잠자리를 한 홍륜과 한안 등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내시 최만생은 홍륜의 무리를 죽이기는커녕 그들에게 공민왕의 살해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아마도 최만생은 진실을 알고 있는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합니다. 심지어 최만생은 한안 등과 짜고 왕을 죽일 계획을 세운 후,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살해합니다. 이로써 고려의 중흥(中興)을 꿈꾸었던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은 즉위한 지 23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공민왕을 살해한 최만생과 홍륜의 무리들은 그 다음날 모두 이인임(李仁任)과 경복흥(慶復興) 등 중신들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고려 조정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습니다. 특히 누구를 왕위에 앉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새롭게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이인임과 공민왕의 친모인 명덕태후(明德太后) 그리고 경복흥(慶復興) 사이에 치열한 암투(暗鬪)가 벌여졌습니다. 이 권력 암투는 이인임의 승리로 끝났고, 이에 우왕(禑王 : 제32대)이 공민왕의 다음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왕을 추대한 이인임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고려의 몰락이 본격화하는 시점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출생과 관련하여 숱한 억측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임금입니다. 그는 훗날 이성계(李成桂) 세력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는 이유를 붙여 자신의 아들 창왕(昌王 : 제33대)을 폐위함에 따라, 왕씨(王氏)가 아닌 신씨(辛氏)의 자식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써야 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써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던 우왕과 창왕(昌王)은 왜 '신돈의 핏줄'이라는 의혹을 받아야 했을까요?

우왕은 공민왕이 신돈의 여종인 반야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왕은 7살 때까지 신분을 숨긴 채, 신돈의 집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 공민왕은 문무백관들에게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우왕을 궁궐로 데려왔습니다. 공민왕은 당시 이인임에게, 신돈의 집에 있던 여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라면서 우왕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우왕은 공민왕의 모친인 명덕태후의 손에서 자라났고, 강녕부원대군(康寧府院大君)으로 봉해졌습니다. 또한 공민왕은 우왕의 생모가 반야가 아닌 이미 죽은 궁인(宮人) 한씨(韓氏)라고 조작해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우왕에게 다음 보위를 물려줄 때 공연한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겠다는 공민왕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우왕은 커다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 궁궐의 가장 큰 어른인 명덕태후(明德太后)가 우왕을 제쳐두고, 왕족(王族) 중 한 사람을 골라 왕위에 앉히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인임 세력은 공민왕의 유지임을 앞세워 우왕을 추대합니다. 이 일로 이인임은 일약 권력의 최고 실세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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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이인임(李仁任)'에 보면, 당시 우왕은 이인임을 아버지, 이인임의 처 박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출생 배경에 약점이 있던 우왕이 이인임을 얼마나 믿고 따랐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인임은 우왕의 신임과 자신의 권세를 믿고 온갖 악행과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인임은 이에 반감을 품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축출당하고, 결국 경산부(京山府)에 안치되었습니다. 훗날 우왕 또한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세력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당합니다.

우왕이 폐위된 후,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보위를 이었지만 역시 1년 5개월 만에 폐위당하고 맙니다. 우왕을 폐위할 당시, 이성계는 조정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창왕의 즉위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창왕이 즉위한 다음해에 우왕의 복위를 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삼아 창왕까지 폐위시켰습니다. 이때 이성계 세력이 창왕 폐위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 바로 우왕은 '왕씨(王氏)가 아닌 신씨(辛氏)의 자손'이며 따라서 창왕 또한 신씨(辛氏)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왕과 창왕이 신씨(辛氏)의 자손이라는 주장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 정설(定說)로 굳어지게 됩니다. 조선 세종(世宗) 때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우왕과 창왕을 고려의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아, 실록을 편찬하지 않았습니다.

신돈이 죽고 난 후 공민왕이 우왕을 궁궐로 데려와 자식임을 밝힌 것이나 말년에 후사(後嗣)를 얻기 위해 택한 여러 가지 엽기적인 성행각을 볼 때,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인가에 대한 의혹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것 역시 추측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닌 신씨(辛氏)라는 주장은 이성계 세력이 창왕 폐위의 명분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풀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반역자인가? 새 시대의 영웅인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한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는 한편 조정에서 최영 세력을 완전히 축출했습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당시 좌군(左軍)을 이끈 조민수(曺敏修) 세력 때문에, 이성계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습니다. 이성계 세력과 조민수 세력은 폐위한 우왕을 대신해 누구를 왕좌(王座)에 앉혀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성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조민수는 당시 명망 높은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이색(李穡) 및 공민왕의 제3비인 익비 한씨(韓氏)와 손을 잡고 창왕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9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창왕을 왕좌에 앉힌 조민수는 권력의 핵심 실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성계와 손을 잡은 신진사대부 관료들이 전제개혁(田制改革)으로 조민수를 압박하는 한편 부정부패 혐의를 씌워 창녕으로 유배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조민수가 유배당한 이후 이색은 홀로 조정을 이끌어 나가지만, 이성계 세력들이 속속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자 결국 낙향하고 맙니다. 조민수와 이색이 조정에서 사라지자, 이성계 세력은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은 신진사대부 중 온건개혁파의 수장인 정몽주와 손을 잡고 창왕을 폐위하는 한편, 왕족(王族)인 정창군 왕요(王瑤)를 임금으로 옹립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 제34대)입니다. 공양왕을 옹립한 이성계 세력은 조정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쥔 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갑니다.

그들은 먼저 화근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우왕과 창왕을 살해했습니다. 또한 이성계 세력은 대대적인 개혁 작업을 추진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다졌습니다. 그리고 고려 왕조를 대신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는 계획을 비로소 실행에 옮깁니다.

이 역성혁명 계획의 최대 걸림돌인 정몽주가 제거되자, 결국 이성계 세력의 중심인물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은 1392년 7월,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합니다. 이로써 34대 474년간 존속해 온 고려 왕조는 문을 닫게 됩니다. 폐위된 공양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어 원주 → 간성 → 삼척 등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가, 이성계의 명령에 따라 사사당하고 맙니다.

'旦廢瑤殺(단폐요살 :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죽였다)'에서 단(旦)은 이성계의 휘(諱)이고, 요(瑤)는 공양왕(恭讓王)의 이름입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공양왕을 옹립했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기 위해 공양왕을 폐위하고 죽였습니다. 새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성계는 새로운 시대를 연 영웅이겠지만, 고려 왕조의 시각으로 보면 이성계는 만고의 반역자이자 대역죄인일 뿐입니다. 이성계를 반역자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를 연 영웅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필자는 다시 한 번 '역사는 승리한 자의 소유물인가?'하는 난제(難題)에 부딪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과 판단은 어떻습니까?

 

 

06 卵生神話 朱首赫脫 난생신화 주수혁탈

알에서 태어난 신화에는, 고구려의 고주몽·가야의 수로왕·신라의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있다. 

卵(알 란) 生(날 생) 神(귀신 신) 話(말씀 화)
朱(붉을 주) 首(머리 수) 赫(빛날 혁) 脱(벗을 탈)

07 桂婁百族 沙梁習比 계루백족 사량습비

고구려의 계루부와 백제의 8족, 신라의 사량부와 습비부이다. 

桂(계수나무 계) 婁(골 루) 百(일백 백) 族(겨레 족)
沙(모래 사) 梁(들보 량) 習(익힐 습) 比(견줄 비)

08 諸加政事 和白會議 제가정사 화백회의

고구려와 백제에는 제가 회의와 정사암 회의, 신라에는 화백 회의가 있었다.

 諸(모두 제) 加(더할 가) 政(정사 정) 事(일 사)
和(화활 화) 白(흰 백) 會(모일 회) 議(의논할 의)

09 居次尼師 祗名麻干 거차이사 지명마간

신라의 임금은 거서간·차차웅·이사금으로 부르다가, 눌지왕부터 마립간이라고 불렀다. 

居(살 거) 次(버금 차) 尼(여승 니) 師(스승 사)
祗(공경할 지) 名(이름 명) 麻(삼 마) 干(방패 간)

10 謨斷寬猛 小獸布律 모단관맹 소수포율

고국천왕은 단호하고 너그럽고 용맹했고,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했다. 

謨(꾀 모) 斷(끊을 단) 寬(너그러울 관) 猛(사나울 맹)
小(작을 소) 獸(짐승 수) 布(펼 포) 律(법칙 률)

 

 
출처 : 시간과공간
글쓴이 : 재휘애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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