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보방~

지리산 종주(참조글).

oldboy-1 2010. 9. 16. 12:10

화엄사계곡 코스 ( 화엄사 → 노고산장 )

 

화엄사 계곡 코스 (노고단에 이르는 전통적인 길)

            화엄사 ▶1.5㎞▶ 제3야영장 ▶4㎞▶ 중재 ▶1㎞▶ 집선대 ▶2.5㎞▶ 무넹기 ▶1㎞▶  노고산장

▣ 총거리 : 10Km

▣ 등정시간 : 3시간 40분

▣ 하산시간 : 2시간 20분

▣ 난이도 : 무난함

 

성삼재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엄사--노고단 코스는 지리산에서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등산로 가운데 하나였다. 예전 지리산 주릉종주를 계획한 사람들은 화엄사를 들머리로 하는 것이 불문률이었고, 노고단까지만 오르는 산행객들도 많아 늘 붐비던 코스다. 지금도 산을 안다는 사람들은 모두 화엄사에서 종주를 시작한다.

성삼재에서 노고단만 보고 내려오는 것은 산행이라기보다 차라리 관광에 가까워 지리산을 왔다면 화엄사 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10대 사찰, 31본산의 하나인 화엄사가 자리잡고 있어 고찰을 둘러볼 수 있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의  집단시설 지구에서 화엄사를 거쳐 10 km의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길은 코재부근을 제외하곤 비교적 수월한 편이고  안내판과 안전시설도 충분하여  어느때나 안심하고 오를 수 있는 곳이다. 화엄사 코스는 비교적 등산로가 뚜렷하고 이정표도 많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다만 부속암자로 난 길과 희미한 옛 길 등이 얽혀 있기도 하므로 이 길로 빠지지 않도록 유념할 필요가 있다. 집선대부터는 경사 급한 너덜지대를 올라야 하기 때문에  다소 힘들다.  속칭 '코재'라고 하여  등반하는 사람들의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경사가 심하다는 곳이다. 무넹기는 노고단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인위적으로 화엄사계곡으로 넘어가게 했다고 해서, 즉 물을 넘겼다는 뜻으로 무넹기라 부른다.  무넹기를 넘어 성삼재에서 올라오는 도로와 마주치는 곳에서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노고단 산장이 나온다.

 

서부 지리산의 관문

 

화엄사계곡 코스는 거찰 화엄사를 경유하여 계곡을 따라 노고단까지 10㎞나 이어진 대표적인 등산로이다. 지리산 종주산행을 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코스이며, 많은 짐을 메고 이 길을 먼저 오르기 때문에 산악인들에게는 힘든 산행 코스로 기억되기도 한다.

근래는 천은사~성삼재~달궁의 도로 개설과 함께 차량편으로 곧장 성삼재까지 올라 도로를 따라 노고단에 오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성삼재 종단도로 개통으로 화엄사계곡 코스는 옛 명성이나 번영(?)을 상당히 잃고 있는 셈이다. 실제 화엄사입구에서 무거운 짐을 메고 코재의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 무넹기에 올라선 등산객들은 성삼재까지 자동차로 올라온 뒤 나들이 하듯 노고단으로 발길을 옮기는 유산객들과 마주치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노고단을 걸어서오르는 것과 자동차를 타고 오르는 것은 천양지차가 있다. 어느 산이든 걸어서 올라야 등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또 화엄사계곡 코스가 지닌 독특한 경관도 누구나 한번은 찾아 보아야 한다.

이 코스의 산해 기점은 화엄사 집단시설지구가 있는 황전리이다. 구례읍에서는 군내버스로 10분만에 닿는다. 황전리 집단시설지구는 지리산에서 가장 정비가 잘돼있다. 상가와 식당, 콘도, 민박업소 등이 골고루 갖춰져 있고, 야영장도 넓게 조성돼 있다. 매표소 안쪽에는 지리산 유일의 프라자호텔도 있다.

원래 화엄사 여관촌은 사찰 입구의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아래편에 있었다. 그 여관촌을 헐고 현재는 '시의 동산'이라고 하여 시비(詩碑)들을 잔뜩 세워두었다. 여관촌은 매표소 바깥쪽의 집단시설지구로 끌어내고, 전에 없던 호텔과 콘도 건물은 매표소 안쪽 숲 속에 새로 건립하게 한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황전리의 버스 종점에서 매표소를 통과하여 사찰까지 도로를 따라가는 것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문화재 많은 화엄사

 

화엄사(華嚴寺)는 문화재가 많은 거찰로 찾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10대 사찰, 31본산이 하나인 이 사찰은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다. 그 후 당나라에서 귀화한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게 되면서부터 화엄사는 늘 많은 대중이 모이는 큰 절이 되었다.

화엄사는 정유재란(1579년) 때 왜병의 방화로 전소됐는데, 이때 장육전(각황전의 전신)과 그 벽에 화엄경 80권을 새긴 석경(石經)이 파괴되어버렸다.

30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화엄사를 1630년 벽암선사가 복구하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재건하였다. 계파선사의 각황전 재건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장육전이 불탄 뒤 그 재건에 고심하던 벽암스님은 계파스님에게 중건의 대업을 맡겼다. 계파스님은 현재의 대웅전에서 100명의 스님이 100일 기도를 올리게 하고, 그 자신은 중건불사의 성취를 위해 기도승을 시봉하는 공야주를 자원했다. 이윽고 100일 기도가 끝나는 회향일(廻向日)이 된 날, 한 노장스님이 말했다.

"간밤의 꿈에 하얀 노인(文殊大聖)이 나타나 장육전 중건을 위한 화주승(化主僧, 돈 모으는 스님)은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으로 삼으라고 일러주셨소."

이에 따라 모든 스님이 밀가루를 만져본 결과 계파스님만이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았다.

계파스님은 밤새껏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정성껏 기도를 올리던 그의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내일 아침 바로 화주를 위해 길을 떠나되,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시주를 권하라."

계파스님은 날이 밝기 무섭게 산문을 나섰다. 동구 쪽으로 내려가던 계파스님이 첫번째로 마주친 사름은 뜻밖에도 이 고을 일대를 떠돌아다니던 걸인 노파였다. 계파스님은 걸인 노파를 알고 있었으므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문수대성'의 가르침을 생각하고는 노파에게 간곡하게 시주하기를 청했다.

당장 자신이 먹을 쌀 한 톨 없는 걸인 노파는 스님의 시주 간청에 하늘만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이윽고 화엄사를 향해 합장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 큰 불사를 이루가리오니 문수대성은 가피(加被)를 내리소서."

걸인 노파는 그 말과 함께 그만 옆의 웅덩이에 몸은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 모양을 지켜본 계파스님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길로 멀리 도망가 5~6년을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다 한양까지 가게 되었다.

하루는 계파스님이 창덕궁 앞을 걸어가다 나이 어린 공주와 마주쳤다. 이 공주는 계파스님을 보자 무척 반가와하며 달려와 어릴 때부터 꼭 쥐고 있던 손을 펴보였다. 공주이 손에는 '장육전(丈六殿)'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공주가 스님을 만나 손바닥을 펴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숙종은 곧 계파스님을 대궐로불러들였다. 숙종은 공주의 손바닥에 새겨진 글자의 내력을 스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왕은 크게 감명하여 곧 왕명으로 장육전 중건을 하게 했다.

마침내 장육전이 완공되자 계파스님은 이 건물 이름을 대왕을 깨우쳐 보전(寶殿)을 중건하였다고 하여 각황전(覺皇殿)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이것이 각황전의 이름 내력이다. 이 건물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받아 보호를 받고 있다. 또 이 건물 앞의 석등은 국보 제12호, 4사자 3층석탑은 국보 제35호이다. 화엄사에는 그 밖에도 많은 문화재가 있고, 수령 300여년의 올벚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 바로 앞에 서있는 남악사(南岳祠)는 원래 노고단에 있던 것으로 신라 때부터 나라에서 제사를 모셨던 유서 깊은 사당이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

 

노고단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화엄사 경내를 빠져나와 돌담을 끼고 얼마간 계곡을 따라가다 쇠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길을 따라 30분가량 걸어오르면 '서나무 야영장'으로 불리는 곳에 닿는다. 키가 유별나게 큰 나무 아래로 제2, 제3야영장이 조성돼 언제나 많은 캠프족이 들끓는 곳이다. 시원한 계류와 함께 자연속의 낭만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식수대와 하장실 등이 잘 구비되어 있다.

야영장을 지난 뒤로는 시종 돌계단을 밟고 오르게 된다. 종래에는 야영장에서 길을 잘못들 염려도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돌계단길을 다듬어놓아 그런 염려가 없어졌다.

등산로의 지나친 황폐화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이 돌계단이 등산객에게 큰 부담을 안겨준다. 노고단에서 화엄사로 하산하는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진 이 돌계단때문에 무릎 관절의 통증을 느끼만큼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돌계단길 주변은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가 짙은 녹음을 드리우고 있어 여름철에는 시원하고 가을철에는 단풍의 현란한 빛깔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제3야영장에서 참샘, 돌거지, 국수등 따위의 안내판을 지나면 4㎞의 거리에 자그마한 등성이를 넘게 되는데 이곳이 중재이다. 앞으로 이곳에 50㎡규모의 휴게소가 들어설 것이란 소문도 있다.

중재를 지나면 다소 멀어졌던 계곡과 다시 가까이 접근된다. 이곳부터 투박한 돌길이 계속되며, 경사도 점차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길 오른편에 자그마한 규모의 폭포를 만나는데 집선대로서 식수보충과 휴식하기 좋은 곳이다.

집선대에서 눈썹바위에 이르는 약 2㎞는 그야말로 돌밭 천국이다. 그때문에 '덜거덕골'이라는 이름도 붙어 있다. 경사 급한 너덜지대는 코가 땅에 닿을 정도라고 하여 등산객 사이에는 '코재'로 불린다. 앞 사람의 궁둥이가 코앞에 걸린다고 하여 혹자는 '궁둥이 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힘든 경사길을 오르면 편편하고 전망이 훌륭한 반석에 도착하게 되는데, 여기가 눈썹바위이다. 휴식하기에 좋은 곳이나 일부 무지한 등산객들의 방뇨등으로 악취가 진동할 때가 많다. 이 눈썹바위에서 조금만 더 비탈길을 오르면 무넹기 고개에 닿는다. 노고단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심원계곡쪽으로 흐르게 돼 있다. 이 고개에서 인위적으로 도랑을 파서 물을 화엄사계곡 쪽으로 넘어가게 했다고 하여 '무넹기'라 부른다.

무넹기는 성삼재~노고단의 도로가 지나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무넹기부터는 도로를 따라 노고 산장에 닿게 된다. 지계곡이 흘러내리는 곳에서 지름길(돌계단 길)도 나있다.

 

등산객보다 유산객이 많은 노고단

 

노고단은 성삼재 관광도로 개설 이래 등산객보다 유산객이 더 많이 몰려들어 갖가지 부작용을 빚고 있다. 관광객의 소음이 뒤덮고 있고, 쓰레기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성삼재~노고단은 불과 3㎞의 거리로 역시 도로로 연결돼 있다. 시멘트로 포장까지 해둔 이 도로에는 관리공단 소속 차량등이 드나들고 있는데, 때로는 택시도 오르내리는 것이 목격된다.

노고단 정상(1,506m)은 산장에서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이 정상에는 출입금지로 갈 수가 없다. 그 대신 야영장과 식수대 뒤편으로 노고단 고개로 올라가는 돌계단길이 만들어져 있다. 자연보호를 한다면서 길 좌우편은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노고단 고개는 산장에서 10여분이면 오를 수 있다. 이 고개가 지리산 종주산행 루트가 통과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반야봉이 지척에서 건너다 보이고, 서북능선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고개에선 멀리 천왕봉까지 바라다 보인다. 종주산행루트는 이 고개에서 노고단 북사면의 산비탈을 감돌아 임걸령쪽으로 이어진다.

노고단을 찾는 관광객들도 주로 이 고개까지 올라 기념 촬영을 하는 등 요란스럽게 떠들다가 되돌아간다.

 

 

주능선 종주코스 ( 노고산장 → 천왕봉 )

주능선 종주코스 (지리산의 모든것 꿈에그리는 종주코스)

 

노고산장 ▶4㎞▶ 임걸령 ▶3.5㎞▶ 노루목 ▶0.5㎞▶ 삼도봉 ▶2㎞▶ 화개재 ▶2㎞▶ 토끼봉 ▶3㎞▶ 총각샘 ▶3㎞▶ 연하천 ▶1㎞▶ 삼각고지 ▶5㎞▶ 구벽소령 ▶2㎞▶ 신벽소령 ▶4㎞▶ 선비샘 ▶5.5㎞▶ 영신 ▶0.5㎞▶ 세석산장 ▶1㎞▶ 촛대봉 ▶3.5㎞▶ 연하봉 ▶5.5㎞▶ 장터목 ▶0.7㎞▶ 제석봉 ▶1.8㎞▶ 통천문 ▶0.5㎞▶ 천왕봉

 

▣ 총거리 : 45Km

▣ 등정시간 : 13시간 20분

▣ 하산시간 : 12시간

▣ 장쾌한 주능선 종주길 : 25.5km  - 2001.01.05 최종실측 : 종전-34.2km

 

지리산 서쪽의 최고봉 노고단에서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까지 장장 110여 리가 넘는 남한 단일 산의 능선등반 코스 중 최장, 최고의 코스이다. 해발 1,300m-1,900m의 고봉준령을 넘나드는 45km의 긴 장도이기 때문에  체력과 함께 사전 준비에 당연히 빈틈이 없어야 한다. 평생의 소원으로 간직한 이도 많은 이 장쾌한 주릉을 밟기 위해서는 능선에서 최소한 하룻밤, 초보자가 있거나 느긋한 산행을 원할 때는 이틀밤을 묵어야 제대로 산행을 할 수 있는데 주릉에 올라서는 산행시간까지 합해 산에서 사흘을 묵는다.  등정, 하산거리까지 합치면 보통 60km-70km가 넘는데 일정상으로 2박3일-3박4일이  다소 벅찰 지경이다. 이 주릉길은 1천미터가 넘는 봉우리마다 막힘없이 지리산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능선 곳곳에 샘터와 산장, 야영장이 알맞게 위치하고 등반로도 뚜렷하며 아울러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수 있는 하산길도 중간중간에 많이 있어서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가장 일반적인 등정, 하산코스로는 화엄사계곡 코스, 백무동 기점의 하동바위 코스와  한신지계곡 코스, 중산리계곡 코스와 법계사 코스,  대원사계곡 코스등이 있다.

 

이 능선 종주 코스는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와 여러 갈래의 지능선, 숱한 계곡을 두루 살펴볼 수 있어  전망이 우선 뛰어나고, 변화있는 등반길과 색다른 지형 그리고 유서깊은 사연을 안고 있는 명소가 즐비하여 사시사철 같은 길을 걷더라도 항상 색다른 풍치를 자아내고 상큼한 감흥에 젖을 수 있다. 3일-4일간 산과 대화하며 걷는 맛도, 또 완주를 해냈을 때의 뿌듯함도 결코 적지않아많은 사람들은 고귀하고 추억어린  이 지리산 종주산행 경험을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간직하게 된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역코스는 성삼재가 포장되면서 많이 이용되는데 산행시간은 비슷 하다. 체력이 약하거나 시간 절약하려는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 하지만 예전 주릉 종주의 기점 이 되던 화엄사코스를 통해 노고단에 올라갈 바가 아니면 동쪽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것이 혼잡 스럽지 않아 좋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보통 1박 2일 걸린다.

 

3박4일 일정 적당

 

지리산 주능선은 서쪽 최고봉 노고단에서 이 산 정상인 천왕봉까지 45㎞ 110리에 걸쳐 있다. 남한의 단일 산 능선 가운데 최장최고(最長最高)의 코스이다. 또 해발 고도가 1,300~1,900m의 고봉준령을 넘나드는 산행 코스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지리산 주능선 종주산행은 자체 코스 뿐만아니라 등정, 하산 거리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전체 코스는 최소 65㎞에서 70여㎞에 이른다. 따라서 지리산 종주산행은 2박3일, 또는 3박4일 정도의 일정이 소요된다.

최근 성삼재까지 도로가 개설되고, 또 주능선의 대피소나 야영장에 인파가 넘치는 바라에 야간산행을 포함하여 당일 일정으로 주능선을 답파하거나,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종주산행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주능선의 여러 가지 자연 경관과 사연들을 두루 살펴보고, 산상 야영(하지만, 현재는 대부분지역에서 야영금지-홈제작자주)등을 통해 많은 것을 얻으려면 일정을 충분하게 잡는 게 좋다.

지리산 주능선에는 다행히 샘터와 야영장이 적당한 간격으로 자리하고 있어 산행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주능선 곳곳의 등산로는 종주산행 중 악천후를 만나거나 환자가 발생할 때 피난 코스로 활용할 수 있다.

지리산 종주산행은 장대한 지리산의 매력을 마치 지붕을 타고가며 내려다보듯이 음미할 수 있어 누구나 꼭 경험해 볼 가치가 있다. 주능선 종주산행은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와 여러 갈래의 지능선, 숱한 계곡을 두루 살펴보며 걷는 재미가 독특하다. 또 이 능선길 자체가 한여름철에는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나 환상적인 꽃길을 열고 있고, 겨울철에는 설화를 아름답게 꽃피우는 등 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노고단을 먼저 오른다

 

지리산 주능선 종주산행은 천왕봉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노고단에서 먼저 출발할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옮겨간다. 무거운 짐을 메고 주능선에 처음 올라서는 것은 해발고도가 천왕봉보다 400m가 낮은 노고단쪽이 유리하다. 또 종주산행의 마지막 목표지점이 천왕봉일 때 주봉에 올라선 감격이 그만큼 크게 느껴질 것이다.

노고단은 정상(1,506m)에서 노고단 고개로 뻗어내린 지맥에서 경사 17~18도로 완만하게 전개된 약 100여 정보의 고원이다. 노고단(老姑壇)의 옛이름은 길상봉(吉祥峰)으로 신라시대에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노고단이라는 이름도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남악사(南岳祠)가 원래 이 노고단에 자리했었다.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심신수련도장으로 활용되었던 이 노고단에는 지난 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49동이 세워졌다. 이 수양관 건물은 48년 여순사건 여파로 불태워졌는데, 일부 건물은 그 잔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노고단 주변에는 종석대, 관으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 등이 예부터 명승지로 꼽혀 왔다. 이 고원 일대는 봄철의 진달래, 철쭉, 여름철의 원추리 군락이 유명하다. 이곳에는 운해(雲海)를 자주 볼 수 있는데, 노고 운해는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이다.

'어디에서 몰려왔는지도 모르게 운무(雲霧)가 파도처럼 밀려와 산야와 계곡을 메우고, 수려한 노고단 중턱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면, 홀연히 운해만리(雲海萬里) 구름바다를 이루어 높은 봉은 점점이 섬이 되어 완연히 다도해로 변한다. 이 변화무쌍한 자연조화의 신기로운 경관은 오직 숙연한 감동과 외경감(畏敬感)을 안겨준다.'(이종길 지음<지리영봉>)

노고단에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직영하는 대형 산장 건물과 야영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화엄사에서 산행을 시작한 경우 이곳에서 하룻밤 머문뒤 다음날 아침 일찍 산행에서 나서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고단 고개로 넘어가야

 

노고단 정상 아래편에 방송 송신탑과 부속 건물이 있고, 정상에는 청학동 주민들이 3일 동안 공들여 쌓았다는 돌탑(케룬)이 서있다. 얼마 전까지 봉신부대가 주둔하다 철수했지만 철조망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노고단 정상에는 오를 수가 없고, 등산로는 산장 동쪽의 잘록한 노고단 고개로 이어져 있다. 요즘은 돌계단길도 만든데다 좌우편에 철조망을 둘러놓았다. 산장에서 10여분만에 닿는 노고단 고개에서 반야봉과 천왕봉까지 지켜볼 수 있다.

이 고개의 이정표가 서있는 곳에서 노고단 북사면의 숲속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이 길은 거의 수평인데다 상당히 부드러운 편이다. 숲속의 싱싱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시원한 느낌을 안겨준다. 고개 이정표에서 약 20분 정도 거리에 평편한 공터가 있다. 지난 1988년 11월 6일 제1회 '민족통일 대동장승굿'을 노고단에서 열고 '민족통일 대장군'과 '민중해방 여장군'의 장승 2기를 이곳에 세웠었다. 민중 단체들이 연합하여 만든 이 장승은 누군가에 의해 전기톱질을 당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노고단 북쪽 사면의 숲길을 빠져나가면 전망이 밝게 트이면서 능선 평지길이 나온다. 노고단 정상에서 내려오는 희미한 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돌부덤 비슷한 것이 있고, 비목이 세워져 있다. 지난 70년대에 고교생 3명이 폭설에 갇혀 조난, 그 가운데 한명이 동사했다. 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임걸령에는 전설이

1,424고지를 가볍게 오르는 능선길은 전망이 아주 빼어나다. 남쪽으로는 왕시루봉 능선과 피아골이, 북쪽으로는 만복대 능선과 심원골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424m봉우리에는 등산 시즌 중 당귀차 등을 파는 노인이 있다. 20수년째 지리산에서 살고 있다는 이 노인의 본가는 부산에 있다고 한다. 그의 캠프(?)는 노루목 쪽에 있다는데, 노루목에서 당귀차를 파는 사람의 캠프는 반대로 이 쪽(돼지령 부근)에 있다고 한다. 가끔 그의 아들이라는 청년이 임걸령에서 땀을 흘리며 물을 길러오기도 한다.

1,424고지에선 약간 내리막길을 거쳐 풀밭이 펴쳐진 돼지평전에 닿는다. '돼지평전'이란 색다른 이름은 마늘 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다시 구상나무, 잣나무 숲길을 얼마간 감돌아 가면 '임걸령 삼거리'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서 다시 숲길을 10여분 감돌아가면 임걸령에 닿는다. 샘터와 야영장이 먼저 눈에 띈다. 지리산 종주산행에선 이 샘물과 야영장(나무숲 사이에 자연적으로 조성되었다)이 아주 요긴하게 이용된다. 그러나 샘터 주변이 지저분한게 큰 결점이다.

임걸령(林傑嶺)이란 이름은 조선 명종때의 초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그는 화살보다 더 빨리 다녔다고 하는 다소 과장된 듯한 전설이 있다. 이 임걸령에서 곧장 남쪽으로 피아골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다. 임걸령 삼거리~불로교 삼거리의 능선길이 개척되기전에 이용되던 산길이다. 바로 이 옛길이 시작되는 곳에 '황호랑이 막터'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 전설이 재미있다.

 

화엄사 계곡 어귀에 황전리(黃田里)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성이 황씨(黃氏)인 한 총각이 지리산의 약초를 캐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약초를 캘 수 없는 겨울철에는 나무 주걱을 대신 만들어 팔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황총각은 주걱을 깎으러 지리산에 들어갔는데, 그날은 유달리 집에서 기르던 암캐가 따라나섰다.

황총각은 반야봉의 밀림지대에서 주걱을 한 짐 깎아 집으로 돌아가려고 임걸령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별안간 눈이 내리면서 날까지 저물었다. 그는 걷기를 단념하고 임걸령 샘에서 동쪽으로 30여m 떨어진 낭떠러지로 내려가 바위를 의지하여 나무가지를 모아 간단히 산막을 만들었다. 그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산막에서 밤을 새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주인을 따라온 암캐가 새끼 7마리를 낳았다.

밤이 깊어가지 눈은 멎고 하늘이 맑게 갰으나, 호랑이 한 마리가 느닷없이 나타나 으르렁거렸다. 황총각은 어쩔수 없이 강아지를 차례로 호랑이 입으로 던져 주었다. 그는 이번에는 벌겋게 단 돌덩이를 주걱으로 던져주며 "옛다, 먹어라!"고 했다. 이를 덥썩 받아삼킨 호랑이가 포효하며 눈 위에 뒹굴다가 죽었다.

남다른 용기와 지혜로 무기도 없이 호랑이를 잡은 황총각에게 고을에서는 큰 상을 내렸으며, 그에게 '황호랑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그때의 그 막터는 지금도 '황호랑이 막터'로 불리고 있다.

임걸령은 원래 '몰두덩이'라고 불렀다. 화랑들의 연마도장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가파른 내리막길 2㎞

 

삼도봉(三道峰)은 불무장등능선이 흘러내리는 시발점이다. 해발 1,550m의 이 봉우리 이름이 삼도봉으로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원래는 이 봉우리를 이루고 잇는 바위 모양이 '낫날'같다고 하여 '낫날봉'으로 불렸다. 이것이 등산객들에게 와전되어 '날라리봉'으로 불리어졌다. 날라리봉이란 이름이 천박하게 들린다고 하여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이정표를 세우면서 '삼도봉'으로 명명했다. 이 봉우리에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가 분기하므로 삼도봉이란 명칭은 적절한 것 같다.

삼도봉은 지리산 주능선 가운데 훌륭한 망루의 하나이다. 근래 이곳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불무장등능선으로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중간 중간에 길이 희미한 곳도 있어 맑은 날씨에 산행 경험이 많은 사람과 동행해야 한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는 2㎞의 짧은 거리이다. 이 봉우리에서 동쪽의 바위벼랑을 비껴 내려가면 잠시 후에 급경사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잘룩한 해발 1,360m의 화개재로 내려서는 길인데 등산로의 훼손상태가 극심하다. 나무뿌리가 어지럽게 노출돼 있고, 물기가 있을 때는 굉장히 미끄러운 길이다. 자칫하면 활락 또는 전락사고가 우려되는 곳이다.

화개재는 지리산 주능선 가운데 해발 고도가 가장 낮은 곳으로 헬기장과 더불어 마당같은 공터가 생겨나 있다.

화개재 북쪽은 뱀사골이다. 북쪽의 가파른 비탈을 따라 200m만 내려가면 뱀사골 산장이 있다. 식수와 기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고, 특히 이곳 원두커피 맛은 등산의 피로를 풀어주고도 남음이 있다.

화개재에서 남쪽의 연동골로 희미한 길이 이어져 있다. 처음에는 배수로처럼 좁다란 길이 내려갈수록 뚜렷하게 넓혀진다. 이 연동골~목통마을의 산길은 지난날 화개장터의 짐을 나르던 옛길인데, 지금도 뱀사골 산장에 짐을 나르는 길로 이용되고 있다.

화개재에서 계속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진 길이 종주 루트이다. 2㎞의 오르막길이 끝나는 곳에 토끼봉이 자리하고 있다. 토끼봉 정상 일대는 진달래와 철쭉의 관목숲으로 4월말부터 연분홍 빛깔의 꽃을 피운다.

토끼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을 따라 칠불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잘 이어져 있다. 근래 이 산길은 칠불사 위쪽에서 차단이 되어 왼편의 산비탈을 따라 범왕리 입구로 하산하게끔 돼있다. 이 능선길은 조난자가 발생했을 때 피난 루트로 유용하게 활용되기도 한다. 토끼봉에서 칠불사는 8㎞의 거리이다.

 

총각샘 지나면 연하천

 

토끼봉에서 계속 주능선을 따라 6㎞를 더 가면 연하천 산장에 도착한다. 토끼봉에서 명선봉을 거쳐 연하천 산장에 이르는 이 길은 비교적 평탄하고, 숲 사이의 길을 걷게 되므로 누구나 무난하게 갈 수 있다. 구상나무 숲길을 내려섰다가 갖가지 잡목숲을 지나 다시 완만한 능선 안부로 올라선다. 또 고목나무가 쓰러져 뒹구는 경사길을 한동안 오른 뒤 북쪽 사면의 평탄한 길에 이어 돌밭길을 지나면 '총각샘' 이정표 앞에 도착된다. 토끼봉~연하천 산장의 중간 지점이다.

총각샘은 남쪽 능선 너머 20여m의 지점에 지리하고 있다. 커다란 벼랑 아래서 샘물이 솟아나고, 그 앞에 넓은 공터가 있다.

이 총각샘은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 이용했던 샘이라고 하는데, 지난 1920년 7월에 지리산 산악회의 노총각 2명이 수소문 끝에 발견했다고 한다. '총각샘'이란 이름도 그런 연유로 불려지고 있는데, 장터목의 '산희샘'이란 여성적인 명칭과 대비시킨 뜻도 있다.

총각샘에서 남쪽으로 비탈을 타고 내리면 산태골을 거쳐 빗점골로 하산하게 된다. 그러나 등산로가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함부로 발을 들여놓는 것은 금물이다.

의신마을 등지의 지리산 주민들에 의하면 총각샘에서 자살한 총각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경치가 썩 좋은 이곳을 지리산 주민들은 의외로 무서운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총각샘 이정표를 지나면 다시 경사가 심한 꽤 까다로운 오르막길이 나온다. 이 미끄러운 바위 벼랑길을 한 차례만 기어오르면, 다시 완만한 능선길로 바뀌어진다.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따라 명선봉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마침내 길은 내리막 흙길로 변하고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연하천 산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연하천(烟霞泉)은 해발 1,500m 이상의 고산지대인데도 맑고 시원한 물이 계류를 이루어 흘러내린다. 이곳에 자리잡은 연하천 산장은 지난 1982년 건립된 50㎡ 남짓한 아담한 건물로 5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 이 연하천이란 이름도 구례의 지리산 산악회(전신은 연하반산악회)에서 명명하였다.

연하천 산장에서 동쪽으로 질퍽거리는 길을 따라가면 곧 빗점골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평탄한 능선길이 나온다. 이곳에서도 절터골을 따라 빗점골에 이르는 비상 루트가 있다. 의신마을 주민들이 산나물을 채취하느라 오르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이 비상 루트 역시 산행 경험이 있는 사람과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

 

벽소령 지나 선비샘

 

연하천 산장을 지난 얼마 후 갈림길이 나있다. 북쪽의 길은 영원재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삼정리로 가는 루트이다. 동쪽으로 계속 이어진 길이 종주 코스로 곧 삼각봉에 올라서게 된다. 해발 1,462m의 이 삼각봉은 지리산 중심부의 망루로서 뾰족한 전망대처럼 생겼다.

삼각봉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따라가면 특이한 모양의 바위를 만나게 된다. 높이 10m가 넘는 두개의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모습이다. '형제바위'라고 불리는 이 입석바위도 전설이 있다. 옛날에 성불 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져 지금과 같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로 불린다.

연하천~벽소령은 6㎞의 거리로 큰 굴곡은 없다. 그러나 오르락 내리락하는 이 산길은 다소 지친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며, 특히 돌밭길에서 많은 피로를 느낄 수도 있다.

숲길을 빠져나와 벽소령에 도착하면 일단 '해방된 느낌'을 받는다. 우선 넓은 공터가 시원한 기분을 안겨준다. 벽소령은 종주 코스의 거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산행에 대한 상당한 성취감을 느낄 수도 있다.

벽소령은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인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하다.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라고 할 벽소령을 덮고 있는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이 차갑도록 푸른 유기(幽氣)마저 감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서 맞는 달밤의 고요는 현묘한 유수로 몰고가는 태고의 정적 그것이라고나 할까.' (이종길 지음 '지리영봉')

벽소령은 일명 벱실령으로도 불리는데 남쪽 소로길 200m 지점에 벱실샘(일명 범뱀샘)이 있다. 벽소령은 또 군사 작전도로가 개설된 것으로 유명한데, 지난 70년대 초 하동군 화개면 신흥마을에서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까지 38㎞의 1차선 도로를 뚫었다. 현재는 남쪽의 도로는 무너진 곳도 있고 잡목이 뒤덮혀 폐도로 버려져 있으나, 북쪽 마천쪽은 지프차 등이 오르내리고 있다.

서쪽의 헬기장이 있는 벽소령을 구벽소령 또는 '화개 벽소령'이라 부르고, 1㎞ 동쪽의 벽소령을 신벽소령 또는 '마천 벽소령'이라 일컫는다.

등산로는 능선의 소로 대신 작전도로를 그대로 따라가는데, 잡목이 많이 우거져 오솔길처럼 돼 있다.

마천 벽소령에선 덕평봉의 숲 속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부드러운 흙길이 키 큰 나무들의 숲에 덮여 있지만 오르막길이 한바탕 땀을 흘리게 만든다. 20분 가량 이 길을 치고 오르면 오른쪽으로 길이 꺾이면서 평탄해진다. 덕평봉 남쪽 사면으로 돌아가면 넓다란 평지와 함께 선비샘이 나온다. 선비샘이라고는 하지만, 종래의 샘터를 묻어버리고 파이프를 박아놓았기 때문에 옛 정취는 사라지고 없다.

 

험로 뚫고 오르면 영신봉

 

선비샘에선 곧장 남쪽의 의신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있는데, 이 길을 잘못 드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다. 벽소령에서 범뱀샘을 거쳐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삼정부락에 닿게 되고, 작전도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서면 선비샘에서 하산하는 길과 마주친다. 또 화개 벽소령에서 북쪽 오솔길을 따라 10여분 내려가면 마천 벽소령에서 내려오는 작전도로와 마주친다.

벽소령에서 북쪽의 마천(삼정리)이나, 남쪽의 의신(또는 삼정부락)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는 것처럼, 덕평봉 선비샘에서도 의신부락, 또는 작전도로를 만난 뒤 계속 삼정부락으로 하산할 수 있다.

종주산행을 할 때는 선비샘에서 동쪽(천왕봉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선비샘에서 동쪽의 낮은 능선을 넘어선 뒤 칠선봉에 닿기까지 작은 언덕과 같은 능선을 여러차례 오르내린다. 이 구간에는 다소 위험한 곳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선비샘에서 아주 전망이 좋은 기암기봉의 칠선봉(1,576m)에 닿는 것은 40여분이면 된다.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게 좋다. 칠선봉을 지난 뒤 영신봉(1,556m)에 닿기까지 한 차례 힘든 험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칠선봉은 둘레에 7개의 암봉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친선봉에서 두어 차례 암봉을 넘으면 경사가 급한 돌투성이 길이 나타난다. 여기가 힘든 곳이지만, 근래 안전시설물이 설치돼 돌과 나무 뿌리를 잡고 오르던 스릴은 사라졌다.

이 비탈길을 치고 올라 영신봉 능선에 올라서면 마치 등정을 완료한 듯한 쾌감을 맛본다. 대성골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영신봉 이정표가 서있는 곳에서 영신대로 내려서는 길이 나있다. 일반 등산객들은 무심하게 지나치지만, 기도객들은 이 길을 따라 영신대로 내려간다. 영신대는 대성골 본류를 따라 큰세개골까지 산길이 이어져 있다. 대성폭포와 곁들이는 지리산 비경 루트 가운데 하나이다.

영신봉 이정표에서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곧 세석고원의 방대한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둘레 12㎞, 약 30만평의 이 고원지대엔 철쭉 군락이 너무 유명하다.

세석 산장 남쪽으로 하나의 길이 내려가다가 거림골, 남부능선 루트로 나뉘어진다. 남부능선 루트는 다시 대성골 루트의 가지 하나를 더 벌려놓는다. 또 세석산장 북쪽 능선에서 한신계곡으로 하산하는 길도 나있다.

세석고원은 물이 풍부한데, 여기서는 매년 6월 첫째주말 철쭉제가 열리고 있다. 세석 철쭉은 지리산 8경의 하나이다.

 

아름다운 연하봉의 선경

 

세석고원에서 다시 동쪽의 촛대봉으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간다. 눈앞에 빤히 올려다보이는 봉우리가 상당한 땀을 요구한다. 해발 1,703m의 촛대봉에 서면 천왕봉이 아주 가까운 거리로 건너다 보인다. 올망졸망한 바위들의 군집체인 촛대봉은 그 바위모양들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것과 같다.

촛대봉에서 잠시 비탈길을 내려간 뒤 평평한 능선길이 계속 이어진다. 이 능선길은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려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안고 있다. 종주산행 코스 가운데 비교적 무난하게 걸어갈 수 있는 구간이다. 세석고원~장터목은 6㎞의 거리로 촛대봉까지의 1㎞ 오르막길을 빼면 전체적으로 거의 수평 이동을 하다시피 걷는다.

장터목에 닿기 전에 기암괴석와 야생화들이 황홀한 선경을 펼쳐놓은 연하봉이 산행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준다.

연하봉 이정표를 지나 평탄한 초지 능선 안부를 거쳐 넓고 평탄한 봉우리에 올라선다. 남쪽으로 지능선이 뻗어내린 이 봉우리가 일출봉(日出峰)이다. 장터목 산장에서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새벽 일찍 3㎞를 다시 가야 한다. 천왕봉 일출 구경이 어려울때 이곳 일출봉에서 대신 해돋이를 지켜본다. 일망무제로 탁 틔어있는 천왕봉 일출이 산문적이라면, 이곳 일출봉의 해돋이는 왼쪽에 천왕봉의 커다란 암영을 걸어놓고 있어 더욱 운치가 넘친다.

일출봉에서는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10여분만 걸어내려가면 장터목이다. 천왕봉을 3㎞만 남겨놓은 곳으로, 이제 목표지점을 불과 1시간 거리에 두고있다.

장터목은 지리산에서 노고단과 함께 가장 붐비는 곳이다. 사통팔달로 등산로가 열려있고, 천왕봉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날 남쪽의 시천(矢川)주민과 북쪽의 마천(馬川)주민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였다는 이 장터목이 지금은 등산객들로 날마다 장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

장터목 남쪽 20m 지점에 장터목샘(일명 산희샘)이 있다. 이 샘터의 물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하동바위 코스를 얼마간 따라가면 나타나는 제석단 샘의 식수를 구하는 편이 오히려 더 편리하다.

장터목에서는 남쪽으로 중산리계곡 코스가, 북쪽으로는 하동바위 코스가 연결돼 있다. 중산리와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마침내 천왕봉에 서다

 

장터목에서는 처음 경사 급한 돌비탈 길을 따라 오른다. 제석봉 일대의 고사목지대를 통과하게 된다. 원래 제석봉 일대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잣나무, 구상나무 등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자유당 말기 대규모 도벌로 무참하게 나무들이 짤려나갔다. 이것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일게 되자 도벌의 증거를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의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앙상한 몰골로 황사시켜버린 것이다.

이들 고사목마저 날이 갈수록 점차 쓰러지고 도벌(?)로 사라지고 있다. 근래 제석봉 일원에 다시 구상나무 묘목을 심고 씨앗을 뿌리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원상회복은 참으로 아득한 노릇이다. 제석봉의 처참한 모습은 사람들에 의해 황폐화된 지리산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이기도 하다.

제석봉은 나무가 없다보니 흙탕물이 쏟아져내리기도 하고, 등산로도 제멋대로 어지럽게 나있다. 제석봉 이정표에서 철사다리를 타고 내려서는 곳부터 좌우로 암벽 비탈길이 얼마간 이어진다. '톱날 능선'이라 불리는 곳이지만 그 길이는 짧다. 다시 능선 안부를 만나고 숲 사이 길을 얼마간 따라오르면 통천문(通天門)에 닿는다.

통천문은 예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는, 하늘로 오르는 길목이다. 깎아지른 암벽 벼랑 사이로 통로가 있다. 지난날엔 우천 허만수가 설치한 나무사다리로 오르내렸는데, 현재는 쇠사다리가 가설 돼 있다.

통천문을 오르면 다시 한동안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한 고비인 거대한 암벽 비탈과 만난다. 오른쪽은 통신골로 사태가 난 지역으로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왼편 비탈로 쇠막대기와 쇠줄이 처져 있다. 이 벼랑 지대는 8.15해방 직전 엄청난 굉음을 내며 붕괴되었다.

이 벼랑을 올라서면 천왕봉까지 암괴가 걸쳐 있다. 정상 100m 못미처 칠선계곡으로 내려가는 등산구가 있다. 정상 바로 앞에 헬리포터가 있다.

천왕봉에는 '만고천왕봉ㆍㆍㆍ'의 조식(曺植)선생 싯귀 대신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지리산의 정상이자 남한 육지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208번지, 그리고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100번지에 해당된다.

천왕봉 정상 서쪽 암괴에 '천주(天柱)'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천왕봉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라는 이 말 속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 같다.

 

숙제 많은 천왕봉

 

'천주'라 음각된 곳에서 조금 내려간 능선 평지(공터)가 지난날 성모사당이 세워져 있던 자리이다. 그 아래편 공터에는 성모석상의 천왕봉 복귀를 위해 두류산악회가 세워놓은 철책이 시멘트 바닥에 고정돼 있다. 이 자리는 일제시대에 반토굴식산장이 있었고, 지난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까지 김순룡노인이 지키기도 했다. 현재는 산장 모습은 간 곳이 없다.

천왕봉의 성모석상은 고려시대 이래 1,000년을 모셔왔고, 이 영봉이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발원지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려 태조 왕전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시으로 봉안하였다는 설(說)등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성모석상은 현재 중산리의 천왕사란 사찰에 옮겨져 있다. 성모석상이 그곳으로옮겨가기까지에는 많은 사연이 있다. 어쨌거나 현재 빈 철책만이 쓸쓸하게 성모석상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 천왕봉의 성모석상 복귀 문제는 앞으로 이 영봉이 풀어야 할 첫번째 과제이기도 하다

천왕봉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 오르내리고 있는 것도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장터목~천왕봉 구간 3㎞와 로타리 산장~천왕봉 구간 3㎞가 등산로의 훼손 상태가 극심하고, 천왕봉자체도 이웃 통신골의 산사태 현상 등 염려스러운 지경에 이르고 있다. 또 이 영봉에는 각급 학교 학생들의 단체 등정을 비롯하여 사회단체, 산업체 등의 여러 단체들이 집중적으로 등정, 북새통을 이루기 일쑤이다.

이에 따라 관계 당국은 로타리 산장~천왕봉 구간의 자연휴식년제 시행을 검토하고 있다. 장터목~천왕봉의 등산로에 대한 휴식년제 도입도 화급한 실정이다.

천왕봉은 매년 춘추계 산불방지 기간 동안 출입이 종테된다. 그러나 관계 기관의 단속이 미흡하여 이 기간에도 천왕봉에는 어느 날 하루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질 날이 없다.

'천왕봉의 휴식'이 아주 절실한 실정이다. 이 영봉은 거대한 암괴로 이루어져 있어 쉽게 손상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영봉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주앙받아온 이 봉우리가 근래 너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너무 무질서하게 학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영봉이 신성한 봉우리로 자리 할 수 있게끔 여러가지 조처가 뒤따라야 마땅할 것이다. 이 또한 천왕봉이 풀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천왕봉에서의 하산코스는 다양하게 열려 있다. 지리산 종주산행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하산 루트는 남쪽의 법계사와 로타리산장을 거쳐 중산리로 가는 법계사코스이다. 천왕봉 암봉 아래편에 있는 천왕샘을 거쳐 망바위, 칼바위를 경유하는 이 코스는 9㎞로 가장 빠른 하산길이 된다.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하산 루트는 중봉과 써리봉을 거쳐 치밭목 산장, 무재치기폭포를 따라가는 대원사(大源寺)코스이다. 이 루트는 무려 18㎞에 걸친 만만치 않은 거리이지만, 지리산 종주산행의 진정한 맛을 안겨주는 매력 때문에 종주 코스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그 밖에 중봉에서 하봉을 거쳐 광점리로 하산하는 하봉 루트가 있고, 또 장터목까지 되돌아가 백무동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칠선계곡이나 황금능선 등의 힘든 루트를 따라 종주산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들도 드물게 볼 수 있다.

지리산 종주산행은 통상 2박3일이면 해낼 수 있으나, 여유있게 주변 경관을 살펴보며 악천후에도 대비하기 위해선 3박4일 일정이 적당하다.

 

지리산 종주산행 요령

 

'지리산 종주' 이 말만 들어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슴 벅찬 감동에 젖게 된다. 적당한 간격으로 잇달아 솟아있는 이 산의 수많은 준봉과 준봉을 넘어가는 주능선의 산길은 우리나라 등산로 가운데 가장 장쾌하고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넘쳐난다.

지리산 종주산행은 사시사철 가능하지만, 그 가운데 자연 세계가 생명력을 절정으로 펼치는 한여름철이 가장 매력이 넘친다. 또 이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종주산행을 하게 된다. 겨울철의 혹한기는 또 그대로의 독특한 매력이 넘치지만, 겨울 종주산행은 여러가지 부담이 따르고 산행에 나서는 사람들도 여름철의 10분의 1 수준에 그친다.

한여름철의 지리산 주능선 종주산행 루트는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나 그야말로 '천상(天上)의 화원(花園)'을 이루고 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 꽃밭길을 걸어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자연 세계의 경이로움을 지켜보면, 겹겹으로 이어진 산파(山波)보다 더 벅차고 엄청난 감동의 세계에 젖어 들게 된다.

이 종주산행은 지도상 계획과 실제 산행 사이에는 엉뚱한 어려움이 끼어들어 많은 차질을 빚기도 쉽다. 지도만을 믿고 산행 계획을 세우는 것은 틀림없이 차질을 빚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종주산행 중에는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를테면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안개가 차서 시계를 가리거나, 등산로가 함몰돼 있거나 하는 등의 상황과 맞닥뜨릴 수 있다. 특히 한여름철의 지리산 종주산행에선 반드시 비를 맞게 된다고 생각하고, 그 채비를 단단히 갖추는 게 상식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릴 경우, 등산 일정 자체가 큰 차질을 빚기 마련이다. 지리산의 빗줄기는 마치 물동이를 쏟듯이 집중 호우일 경우가 많은데, 이럴때는 산행 자체를 중단하고 대피해야 할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악천후 못지않게 부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인파이다. 사람들에 밀려 등산로가 정체현상을 빚는 것은 물론, 산장, 샘터가 인파에 뒤덮여 식수문제, 숙식문제로 인해 아수라장을 빚기도 한다. 따라서 지리산 종주산행은 경험이 많은 리더의 동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산행 팀을 3~4명의 그룹으로 편성하여 취사도구, 주식과 부식을 서로 분담하여 배낭의 무게를 가볍게 조정하는 것이 첫째 과제이다. 또 주식과 부식은 고단위 열량 식품을 준비하되 가볍고 변질이 되지 않는 것, 인스턴트 식품 중심으로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요령이다.

지리산 종주는 이제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전대비책을 제대로 세워야 중도 실패나 예기치 않은 곤경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대원사 코스 ( 평촌리주차장 → 청왕봉 )

대원사 코스 (단풍과 설경이 만점인 동쪽 능선의 대장정)

 

코스1

평촌리주차장 ▶2㎞▶ 대원사 ▶2㎞▶ 유평리 ▶5㎞▶ 새재마을 ▶5㎞▶ 920m갈림길 ▶1㎞▶ 무제치기폭포 ▶2㎞▶ 치밭목산장 ▶6㎞▶ 중봉 ▶2㎞▶ 천왕봉

 

코스2

평촌리주차장 ▶2㎞▶ 대원사 ▶2㎞▶ 유평리 ▶5㎞▶ 920m갈림길 ▶1㎞▶ 무제치기폭포 ▶2㎞▶ 치밭목산장 ▶6㎞▶ 중봉 ▶2㎞▶ 천왕봉

 

● 신밭골 코스 총거리: 23Km

    신밭골 : 유평리 → 새재마을 → 920 m 갈림길, 거리 10 km  2시간30분

 

● 한판골 코스 총거리: 18Km

    한판골 : 유평리 → 920 m 갈림길, 거리 5 km   2시간30분

 

● 등정시간: 7시간 50분

 

● 하산시간: 6시간 30분

 

신밭골 코스는 유평리에서 새재마을까지 비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다.따라서 거리상으로는 5 km 더 먼 편이지만 도로를 이용하므로 걷더라도 시간은 거의 동일하다.

대원사계곡 상류는 조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조개골로도 불린다. 가야말기에 구형왕이 들어와 유평 위 외곡에 나라를 세웠고, 현대사에는 빨치산의 경남도당 자리가 있던 곳이다.

지리산을 아는 사람들은 중산리코스가 아닌 대원사∼치밭목∼천왕봉으로 오르는데 주릉종주 때 많이 이용된다.

 

대원사 아래 매표소(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는 30분 걸린다. 승용차는 새재마을까지 갈 수 있다. 넓은 길이지만 보도블럭이 깔려 매표소에서 대원사까지는 별 지루함 없이 갈 수 있다. 길에서 계곡 밑을 쳐다보는 맛도 좋고 군데군데 노송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대원사에서 유평리까지는 20분 걸린다.

 

유평리 왼쪽 외딴집에서 신밭골로 가는 도로를 버리고 산길로 들어선다. 이 골짜기는 한판골로 불리며 상부인고개까지 2시간 걸리는 한적한 코스다. 고개에서 무재치기 폭포를 지나 치밭목까지 계곡을 따라오른다. 1시간30분이 걸린다.

 

근래에는 승용차로 새재마을까지 와서 완만하고 쓸쓸하기까지 한 널따란 조개골을 거슬러 치밭목까지 코스를 택하는 이들이 많다. 시간 또한 2시간40분 걸려 무재치기폭포코스보다 가깝다. 치밭목산장에서도 옛날은 험하고 굴곡 심한 써리봉 능선을 타고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올랐는데 요즈음은 치밭목산장 뒤로 빠져 조개골 상단의 넓은 계곡을 가로질러 중봉과 하봉 안부로 해 중봉∼천왕봉을 오른다. 이도 써리봉보다 30분쯤 짧은 2시간 걸린다.

 

20㎞의 장대한 등산로

 

지리산에서 사람이 사는 골짜기로 제일 깊은 곳인 대원사계곡 코스는 대원사계곡(일명 유평계곡)에서 치밭목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는 루트를 일컫는다. 경사가 완만해 가야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이룬 곳으로 남원의 달궁계곡과 동서 쌍벽을 이루는 골짜기다.

 

비구니 사찰인 대원사(大源寺)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한판골, 신밭골, 조개골, 쑥밭재 등의 여러 갈래가 나있으나,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이정표를 세워둔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곧 유평리에서 한판골을 따라 오르는 '대원사계곡 코스'이다

이 코스는 대원사 주차장에서 천왕봉까지 무려 20㎞ 50리에 이르는 장대한 루트로 능선을 넘고 또 넘거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등 상당한 체력 소모를 요구하는 길이다. 또 소용 시간도 많은 편이므로 치밭목 산장, 또는 그 다음의 장터목 산장이나 로타리 산장에서 1박을 하는 등의 시간계획 수립에 유념해야 한다

대원사는 시천면사무소 소재지인 덕산(德山)에서 중산리 도로와 떨어져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매표소가 지리한 곳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시외버스도 이곳이 종점이다.

이 주차장부터 붉은 보관을 깐 도로를 따라가는데 대원사계곡의 협곡 경관이 빼어나 지루한 느낌이 없다. 이 아름다운 선경은 4㎞나 계속되어 산길이 시작되는 유평리까지 함께 동행하게 된다.

그 중간 지점의 대원사는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져 있는 등 풍치림과 계곡의 선경이 사찰 건물과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답다. 비구니사찰로 조용하면서도 깨끗한 분위기의 대원사는 신라 진흥와 9년 (548년) 평원사(平原寺)라는 이름으로 연기조사가 창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그 뒤 숙종11년(1685년) 운권선사가 대원암을 짓기 시작했고, 고종 27년(1890년) 혜혼선사가 크게 중수하여 이름도 대원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다시 페허가 된 것을 김법일스님이 재건했다. 경내에는 지방문화재 30호인 9층 석탑이 남아있다.

 

심장면 평촌리 주차장에서 천왕봉까지  20여 km의 계곡과 능선길을 오르는 멀고도 힘든 코스에 속한다. 유평리에서 한판골로 또 새재마을에서 신밭골로 오르는 길이 가장 알려져 있고 부담없는데  때에 따라서는 조개골로 해서 중봉, 치밭목, 쑥밭재 등으로 오르는 희미한 길도  다양하게 잡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초행자에게는 당연히 무리다. 대체로 진주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당일 천왕봉을 거쳐 장터목까지 당도하기에 벅차  중간의 치밭목산장에서 1박하는 것이 일정상 기본틀이다.  평촌리에서 새재마을까지 10 km 거리는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비포장도로가 나 있다.

 

평촌리의 넓은 주차장에서 붉은 벽돌로 포장된 도로를 올라가면  좌우로 협곡을 이룬 지세와 동양화 화폭에서나 봄직한 첩첩이 포개진 산자락,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흰 물줄기가 더욱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첫인상을 우선 강하게 받는다. 산모퉁이 하나 돌아 오른쪽으로 휘어져가면 삼밭골과 물골 사이로 긴 지능선 자락이 계곡물을 가로막듯이 뻗어 내려 대원교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면 완만한 계곡과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비포장길이 이어지다가  대원사에 이르며 유평리 본 마을에 올라오면  유명한 가랑잎 국민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유평마을에서 산길로

 

가랑잎초등학교가 있는 유평마을은 정부의 국립공원 독가촌 정비 때 생겨난 마을이다. 피서객이 몰리는 여름철에는 차량과 사람들로 크게 붐비지만, 피난주택 같은 가옥들의 모습이 을씨년스런 느낌을 준다. 그러나 집집마다 민박을 열고 통종닭등의 요리를 파는 것이 주업이다시피하다. 유평국민교가 가랑잎학교란 애칭으로 더 잘 랑려지게 된 것은 운동장에서 가랑잎과 함께 됭구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어느 취재 기자가 이런 이름을 붙였던 데서 유래한다.

 

유평리 이정표에서 한판골로 오르는 코스와 신밭골로 오르는 코스가 갈라지나이 두 코스는 모두 해발 920m 갈림길에서 만나 치밭목으로 오르게 된다. 비록신밭골코스가 5km 가량 비포장도로를 따라 더 가야 하는 점은 있지만  유평에서 같은 시간에 출발하더라도 갈림길까지는 소요 시간이 엇비슷한 편이다.

 

조개골과 장당골의 경계,  그 분수령을 이루는 능선 평지에  자리잡은 치밭목산장은 주위에 참나무가 울창하고 고풍스럽기까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지않는 곳이라서 한적하기까지 하다.  주위에 취나물이 많이 난다 하여  치밭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치밭목을 지나면 능선에 올라서게 되는데 순두류고원이 마치 고공에서 내려다보듯 훤하고  주위에는 온통 기암절벽이 제 생명을 다한고사목과 어울어져 절경을 이룬다. 구곡산 연릉이 아스라이 뻗어있고  여러모로 전망이 훌륭한데 여기서 중봉까지 10리길은 그야말로 스릴만점의 암릉길이다.  써리봉은 바위들 솟은 모양이 마치 '써레'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써리봉 넓은 고대에 올라오면 천왕봉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쭉 내밀고  그 옆에 중봉이 다정하게 마주 보고 있다.

 

 

유평마을을 지나 200m 쯤 가면 외딴집이 있는데 이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한판골의 지류가 흘러드는 곳이다. 등산로는 이 지류 오른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여기서 계속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데, 다소 파라른데다 시야가 막혀 갑갑한 느낌도 든다. 40분 가량 올라 수량이 줄어든 한판골을 건너게 되는데, 이때부터 20분 가량은 급경사지역이다. 키 큰 수림이 싱그럽기는 하지만, 몇 차례의 급경사 길이 되풀이되며 땀을 흐리게 만든다.

이윽고 전망이 탁 트이는 능선 위로 올라서는데 장당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낟. 이제부터는 급경사를 오른데 대한 보상이라두 해주듯 평탄한 길이 산허리를 감돌아간다. 이 산허리를 돌면 길게 협곡을 이루고 있는 장당골과 들쑥날쑥한 암봉의 써리봉이 멀리 바라다 보인다. 이 산길은 장당계곡을 왼편에 끼고 산허리를 게속 오르락 내리락하며 감도며 이어지는 특징이 있다.

대원사 코스는 10년 전 쯤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지않아 여름철에는 수풀이 길바닥을 뒤덮는 바람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코스는 지리산 종주산행의 필수 과정으로 생각하는 등산객이 늘어나고, 무인 치밭목 산장에 민병태가 관리인으로 정착한 이후 길바닥도 휜하게 넓혀졌다.

무재치기폭포 1㎞ 못미친 지점에서 920m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바른쪽 편의 능선을 넘어오는 갈림길이 여기서 합류하는데, 새재마을에서 신밭골을 거쳐 오는 길이다. 근래 새재마을 앞의 계곡에 쇠다리가 가설되고 차량 통행이 이 마을까지 가능해지자 한판골 대신 신밭골을 거쳐오는 등산객이 늘어나고 있다. 경관도 신밭골 쪽이 빼어나다.

이 갈림길에서 등산로는 평탄하게 계속되지만, 무재치기폭포 앞의 계곡을 건너는 부분에서 상당한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게곡을 곧장 건너는 것이 아니라 계곡 한가운데의 바위를 타고 얼마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폭포 위 전망대 장관

무재치기폭포는 투박한 암괴가 인상적이다. 무지개를 친다는 뜼으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철따라 주변의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아름다운 그림을 빚어놓는다. 그러나 3단 폭포로 수맥이 여러 갈래로 퍼져 흘러내리기 때문에 폭포수 자체의 장관을 폭우 때가 아니면 지켜보기 어렵다.

무재치기폭포로 가는 길은 등산로에서 따로 이어져 있다. 폭포 아래까지 갔다가 되돌아나와야 한다. 곧장 폭포 왼쪽의 비탈길로 올라섰을 경우 바른 쪽으로 잠시 숲속길을 따라가 암봉의 전망대를 찾는 것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이 전망대는 아찔한 수직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폭포의 모습이 단연 압권이다.

전망대에서 되돌아나와 다시 계곡을 건너는 10여분 거리의 주변은 모두 야영을 했던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 계곡을 건넌 뒤로는 다시 숲길이 시작되는데 길바닥은 온통 돌투성이이다. 계곡 바닥인지 길바닥인지 분간하기 애매한 곳도 있으나 리본을 잘 살펴보면 길을 놓치지 않는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20분 가량 계속된다. 물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치밭목 산장의 개 짓는 소리가 들리면 마지막 힘을 낼 수 있다.

치밭목 산장은 해발 1,400여 m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원사 코스를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가운 곳이다. 조개골과 장당골의 분수령을 이루는 능선 위에 자리 잡은 이 산장은 무인산장으로 버려져 있던 것을 1987년경 진주의 산악인 민병태가 정착하여 관리한 뒤로 가장 모범적인 대피소가 되고 있다.

치밭목은 취나물 등이 많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며, 참나무 숲 아래의 풀밭이 언제나 "싱그럽다. 이 산장에선 원두커피와 작설차의 맛이 뛰어나 인기가 높다. 그러나 산장의 수용능력이 40명에 불과하다. 치밭목샘은 산장 뒤편 200m 지점에 있는데, 이 샘터에서 하봉 헬기장으로 지름길이 연결해 있다. 이 지름길은 민병태가 개척한 것으로 조개골 등반 루트와 중간에서 만나며, 천왕봉 등정때도 이용된다. 이 길은 써리봉을 거치치 않고 중봉을 가게 된다.

 

써리봉의 절묘한 선경

 

대원사게곡 코스의 원래 루트는 써리봉을 거쳐서 중봉으로 오르는 길을 따른다. 치밭목 산장에서 부드러운 흙길 능선을 30분 가량 오르면 4㎞의 들쭊날쭉한 써리봉 능선에 닿게 된다.

써리봉은 만장년기의 밋밋한 육산인 지리산 능선 가운데 아주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농기구인 써리의 들쭉날쭉한 톱날처럼 암봉이 높고 낮게 줄을 이어 연결돼 있다. 그 기암괴석이 고사목들과 어울려 절묘한 선경을 빚고 있다. 지리산 8경 가운데 연하봉 선경을 꼽고 있으나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써리봉 선경이 앞서는 것으로 믿고 있다.

써리봉 암릉 10리 길은 지난해 철사다리를 촘촘히 세워놓기 전까지는 통나무나 밧줄을 잡고 오르내리는 드릴 만점의 코스였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많은 산악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쇠사다리를 가설했는데, 안전시설물이라 하더라도 원목이나 밧줄만을 이용하여 자연미를 살리는 노력이 너무나 아쉽게 생각된다 쇠사다리를 밟고 가며 이를 탄식하는 산악인들이 적지 않다.

써리봉은 중봉과 천왕봉이 거의 같은 거리로 눈앞에 조망되고, 순두류의 푸른 분지와 황금능선(동남부 능선)과 웅석봉의 웅자가 한눈에 들어노는 등 주변의 산세를 돌러보는 데도 일품이다. 특히 구름띠가 천왕봉 허리를 감쌀 때는 천상의 황홀한 느낌까지 갖게 한다.

써리봉에서 중봉으로 오르는 곳에서 또 한 차례 땀을 흘려야 하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다. 전체 코스 20㎞ 가운데 중봉에 서면 18㎞를 주파해온 것이 된다.

 

'가깝고도 먼 당신'

 

중봉(中峰)은 해발 1,875m로 지리산에서 천왕봉 다음으로 두번째 높은 준봉이다. 하봉이나 칠선계곡에서 올려다보는 중봉의 위용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이 중봉은 천왕봉과 너무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고 있는 느낌이다. 지리산 3대 영봉을 일컬을 때도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으로 중봉, 제석봉 등의 높은 봉우리들을 건너뛰고 있다. 중봉이 반야봉처럼 천왕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면 대단한 위용을 자랑할 것이다.

중봉은 천왕봉에 가려 있지만 그 자체의 조망이 뛰어나다. 또 하봉 루트로 산행을 할 때는 이 중봉이 주요 통과지점이자 갈림길이 있어 신경을 써야하는 곳이다.

중봉에서 천왕봉은 너무 가깝다. 눈으로 보면 직선거리가 수백 m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봉과 천왕봉은 그야말로 '가깝고도 먼 당신'이다. 중봉에서 천왕봉까지 바로 밋밋한 능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잘룩한 안부로 한참 내려간 뒤에 다시 치고 올라야 한다. 체력 소모가 이미 많았던 산꾼들에게는 중봉∼천왕봉의 2㎞가 40분 가량의 땀을 흘리는 악코스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중봉 안부의 중봉샘은 누군가가 손질 놓으면 또 토사에 덮여버리는 등 온전하지가 못하다. 아예 찾지 않는게 마음 편하다. 또 이 안부에서 날쪽으로 쏟아지는 중봉골(일명 마야계곡)의 등반로가 소개되는 일도 있으나 일반인이 찾기는 무리한 곳이다. 기술등반 장비를 갖춘 전문산악인이 안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현명한 노릇이다.

중봉 안부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데는 나무 뿌리를 잡고 매달리다시피하며 올라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겨울철에 천왕봉에서 내려올 경우 상당한 조심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그 곳만 지나면 천왕봉 까지는 20㎞ 장정의 마무리를 한다는 벅찬 감동을 가슴에 안고 천천히 발을 옮겨놓아도 좋다.

 

각급 단체의 소란 행위도

 

천왕봉은 예부터 우리 민족이 숭앙해온 영봉이었으나, 요즘은 수많은 등산객들에 의해 수모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더 많다. 각급 단체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선 고함지르기 대회를 펼치듯이 소란스러운 짓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또 붉은 깃발 등을 흔들며 격렬한 구호를 외쳐대는 경우도 있다.

천왕봉에선 일찌기 해방 직후의 정국 혼란에 편승하여 여순반란군 패잔병이 지리산에 입산하기 이전에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일이 있다. 훗날 북한 강동정치학원 교관을 역임하고, 남한유격대 총사령관으로 남파된 '마지막 빨치산' 남도부(南道富, 본명 하준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은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단독총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남로당 등의 북한 동조 세력은 2,7구국투쟁에 이어 5.10단선반대 폭력 투쟁을 전개했다. 지리산 천왕봉에선 남도부부대 100명 (일설에는 5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이 천왕봉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5월 10일 봉화를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서 습격, 우익 인사 살해 등의 거사를 계획했다. 이 정보가 경찰에 사전 누설되어 거사 3일 전인 5월 7일 함양, 산청, 하동, 진양 등지의 경찰들이 우익청년들을 이끌고 벌떼처럼 천왕봉을 에워싸고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 때는 피아간에 농기구로 무장한 병력이 대부분이었을 만큼 원시적인 싸움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천왕봉에 빨갱이들이 있으니 토벌하러 가야한다기에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우리들은 설마 천왕봉 그 높은 곳에는 빨갱이가 없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히히덕거리며 올라갔던 것이다 총소리가 나자 우리는 삼십육게 놓기에 바빴다."

토벌대에 동원된 한 청년의 진술이다. 이 천왕봉 무장봉기는 짧은 전투 끝에 양쪽 모두 천왕봉에서 퇴각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그러나 그날의 해프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해 가을부터 지리산 전역은 장장 7년에 걸쳐 빨치산과 토벌대의 처절한 전장으로 피을 뿌리게 되었던 것이다.

천왕봉에는 이 밖에도 역사의 편린들이 수없이 많이 점철돼 있다. 천왕봉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그 편린의 어느 한 가지라도 가슴으로 의미를 새겨보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